[핵심 요약]
명목임금은 올랐습니다. 그런데 실질임금은 2022년, 2023년 2년 연속 하락했습니다. IMF 이전 연 10%대 예금금리 시절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저축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숫자와 사람 이야기로 확인합니다.

도입부 — 러닝머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금은 쓰레기다.”
2020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의 창업자 레이 달리오가 단상에서 이 말을 꺼냈을 때, 청중의 절반은 웃었습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굳은 표정으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월급날마다 조용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난달 월급을 받으셨습니다. 숫자는 분명히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마트 계산대 앞에서, 아이 학원비 고지서 앞에서, 주유소 결제창 앞에서 — 뭔가 늘 모자랍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당신의 느낌은 정확합니다. 오히려 숫자보다 더 정확합니다.
문제는 당신이 뛰는 속도가 아닙니다.
러닝머신이 문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임금·화폐 구조는 역방향으로 돌아가는 러닝머신과 같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뛰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매일, 쉬지 않고. 그런데 벨트는 당신이 뛰는 방향의 반대로, 그리고 당신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멈추면 즉시 뒤로 밀립니다. 더 열심히 뛰어도 제자리입니다.
저축까지 하면 — 이건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일단 이 질문을 머릿속에 꽂아두십시오.
당신은 지금 뛰고 있습니까, 아니면 뒤로 밀리고 있습니까.
기분 탓이 아니었습니다 — 숫자가 먼저 말합니다

2022년,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를 보면 그해 근로자 1인당 명목임금은 전년보다 올랐습니다. 뉴스는 “임금이 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맞습니다. 숫자는 올랐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1%였습니다. 물가가 임금보다 빠르게 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2022년 실질임금은 전년 대비 0.2% 감소했습니다. 통계 기준이 바뀐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실질임금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해였습니다.
러닝머신 비유로 다시 보겠습니다.
당신의 발 속도(명목임금): 올라가고 있음 벨트 역방향 속도(물가상승률): 시속 5.1km
발이 아무리 빨라져도 벨트가 더 빠릅니다. 순 이동 거리는 마이너스입니다.
2023년은 더 나빴습니다.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에 따르면 그해 명목임금은 전년 대비 2.5% 올랐습니다. 그런데 소비자물가는 3.6% 상승했습니다(통계청). 실질임금은 -1.1%, 2022년에 이어 2년 연속 하락이었습니다. 발 속도는 줄었는데 벨트 속도는 여전히 빠릅니다.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OECD가 2023년 발표한 ‘Employment Outlook’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 사이 OECD 38개국 가운데 실질임금이 상승한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미국 노동통계국(BLS)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미국의 실질임금은 전년 대비 최대 -4%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선진국 노동자 대부분이 같은 러닝머신 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워런 버핏은 1981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서한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플레이션은 투자자에게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이 말이 나온 지 40년이 훌쩍 지났는데, 2025년 한국에서 더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투자자뿐만이 아닙니다. 월급 받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는, 고지서도 없고 영수증도 없는 세금입니다. 그리고 이 세금은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습니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숫자가 먼저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축의 배신 — IMF 이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잠깐 시간을 되돌려 보겠습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던 30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달 월급에서 30만 원을 떼어 은행 정기예금에 넣었습니다. 당시 정기예금 금리는 연 10~12%였습니다. 한국은행 ECOS 자료가 확인해주는 수치입니다. 100만 원을 예금하면 1년 후 110만 원이 됐습니다. 10년을 복리로 굴리면 원금이 약 2.6배가 됐습니다.
그 시절 저축은 진짜로 작동했습니다. 성실하게 모으면 실제로 불어났습니다. 러닝머신이 역방향으로 돌긴 했지만, 예금금리가 그 속도보다 빨랐습니다. 뛰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2021년 기준 시중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연 1%대 초반이었습니다. 같은 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였습니다(통계청). 실질 예금수익률을 계산하면 약 -1.3%에서 -1.5% 수준입니다.
1990년대: 예금금리 연 10~12% / 물가상승률 약 6~7% → 실질 수익 +3~5% 2021년: 예금금리 연 1%대 / 물가상승률 2.5% → 실질 수익 약 -1.3%
같은 러닝머신인데, 완전히 다른 벨트 속도입니다.
1,000만 원을 예금에 넣어두면 1년 후 명목 잔액은 약 1,010만 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1,010만 원의 실제 구매력은 985만 원 수준입니다. 숫자는 늘었는데 살 수 있는 것은 줄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예금이 러닝머신보다 빨랐습니다. 지금은 러닝머신이 예금보다 빠릅니다. 같은 행동인데 결과가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반론을 먼저 꺼내겠습니다.
“2022~2023년 고금리 시기엔 예금이자도 4~5%까지 올랐잖아요?”
맞습니다. 그 시기 예금금리는 실제로 올라갔습니다. 잠깐은 실질 예금수익률이 플러스에 근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행 자료와 통계청 물가 데이터를 월별로 대조해보면, 그 시기에도 예금금리가 근원 인플레이션율을 실질적으로 앞선 달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이후 금리는 다시 인하 사이클에 접어들었습니다.
고금리는 잠깐이었습니다. 실질 마이너스는 구조입니다.
더 긴 시간 단위로 보면 이야기는 더 선명해집니다. 한국은행 ECOS 기준으로 2000년의 소비자물가지수를 100으로 놓으면, 2024년 현재 물가지수는 170을 훌쩍 넘습니다. 2000년에 1만 원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을 지금은 1만 7,000원을 내야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러닝머신은 24년 동안 멈추지 않았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이 1963년 『화폐의 역사』에서 남긴 문장이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
코로나 직후 한국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경기 부양을 위해 전례 없는 속도로 돈을 찍어냈습니다. 한국의 M2 광의통화 증가율은 2020년 9.82%, 2021년에는 12.93%까지 치솟았습니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구기준). 돈이 많아지면 돈의 가치는 내려갑니다. IMF 이전 예금금리가 높았던 것은 단순히 은행이 관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시절에는 자본이 희소했고 돈의 가치가 달랐습니다. 지금은 돈이 너무 많이 풀렸습니다.
문제는 당신의 통장 잔액이 조용히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 역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요즘 유독 힘들다”고 느끼십니까. 그 느낌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반복됐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한 사람들이 가장 크게 손해를 봤습니다.
1970년대 미국 — 성실함이 집단으로 패배한 10년
1973년 오일쇼크가 터졌습니다. 중동의 산유국들이 석유 수출을 줄이자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고, 물가가 연 10%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는 침체인데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이 됐습니다.
미국 노동통계국(BLS)과 NBER 자료에 따르면 1973년부터 1980년 사이, 미국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누적 기준으로 15% 이상 하락했습니다. 7년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의 실질 소득이 15% 줄어든 것입니다. 러닝머신 벨트가 갑자기 최고 속도로 돌아갔고, 발을 더 빠르게 움직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시기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저소득 근로자와 은퇴 후 연금·저축에 의존하던 노인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이 패턴은 반복됐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20년 후 한국으로.
1997~1998년 한국 — 가장 가까운 기억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한국의 실질임금은 두 자릿수에 가까운 급락을 기록했습니다. 기업들은 임금을 동결하거나 삭감했고, 그 와중에 물가는 치솟았습니다. 이중 타격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 예금금리는 연 15%를 넘기도 했습니다. 한국은행이 외환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를 급격히 올렸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저축하면 돈이 불어나는 시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대규모 실직, 기업 도산, 자산 가치 폭락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예금금리가 아무리 높아도 직장을 잃으면 넣을 돈이 없었습니다. 러닝머신에서 그냥 떨어진 것입니다.
그 위기의 가장 큰 유산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에서 비정규직 구조가 고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흔들린 고용 안정성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러닝머신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면, 그 흔들림은 구조로 굳어버립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반복됐습니다. 이번에는 전 세계 동시에.
2021~2023년 글로벌 인플레이션 — 현재진행형
코로나 이후 전 세계적으로 통화량이 급격히 늘었고, 공급망 충격이 겹쳐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미국·유럽·한국 모두 실질임금이 하락했습니다. 미국은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부 진압했지만, 한국은 진압이 불완전한 채로 구조적 임금 경직성이 남아있습니다. 그 결과가 2022~2023년 2년 연속 실질임금 하락입니다.
역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벨트가 빨라질 때, 가장 먼저 뒤로 밀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해져 있습니다.
평생 아낀 사람이 가장 먼저 무너집니다

지금부터가 이 글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입니다.
이 러닝머신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실물자산이 있는 사람에게는 느리게, 없는 사람에게는 빠르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빠르게 뒤로 밀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벨트의 마찰이 가장 세게 느껴지는 사람들
인플레이션은 모든 사람의 지갑을 털지만, 저소득층의 지갑을 더 깊이 털어갑니다.
통계청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 가구는 소득의 상당 비중을 식료품·에너지·교통 등 필수 지출에 씁니다. 그런데 2022~2023년 인플레이션에서 가장 크게 오른 것이 정확히 이 항목들이었습니다. 식료품 물가는 2022년 한 해에만 5%대 후반을 기록했고, 에너지 가격은 두 자릿수 상승을 했습니다.
고소득 가구는 지출 구조상 필수 지출 비중이 낮습니다. 물가가 올라도 여유 지출을 줄이면 완충이 됩니다. 그러나 저소득 가구에는 줄일 여유 지출 자체가 없습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신고 있는 신발 밑창이 얇을수록, 벨트의 마찰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인플레이션은 세금이되, 가난한 사람에게 더 높은 세율로 부과되는 역진세입니다.
저소득 근로자들이 이 러닝머신에서 뒤로 밀리는 동안, 벨트를 아예 잡을 손잡이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지가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달
서울 외곽의 반지하 단칸방에 혼자 사는 70대 이 씨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달 공과금 고지서를 받았을 때, 이 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줄일 수 있는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기초생활수급자 유형입니다. 2023년 기준 생계급여 수급액은 1인 가구 기준 월 62만 3,368원(보건복지부 고시)입니다. 이것으로 월세, 식비, 의료비, 공과금을 모두 해결해야 합니다.
정부는 2023년 기준 중위소득을 5.47% 인상했습니다(보건복지부). 뉴스에서는 “역대 최대 인상”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식료품 물가와 공공요금은 그보다 더 빠르게 올랐습니다. 급여 인상이 실제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간이 발생했습니다. 러닝머신이 복지 시스템보다 빠르게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정의상 실물자산이 거의 없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왔을 때 자산 가격 상승으로 손실을 상쇄할 수단 자체가 없습니다. 전국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2023년 기준 약 250만 명(보건복지부)입니다. 이 씨는 그 250만 명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이 씨보다 더 조용하게, 더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2년 직장 생활의 끝에서 — 가장 조용한 비극

1967년생 박 씨는 올해 퇴직했습니다. 제조업 생산직으로 32년을 일했습니다. 국민연금을 꼬박꼬박 냈고, 퇴직금도 받았습니다. 주변에서 “착실하게 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그가 받는 국민연금 수급액은 월 67만 원입니다.
이것은 허구의 인물이 아닙니다. 국민연금공단이 발표한 2025년 기준 전체 수급자 월평균 수령액은 약 67만 원입니다. 박 씨는 평균입니다.
이 금액으로 서울에서 월세, 식비, 의료비를 모두 감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박 씨는 퇴직 후에도 일용직 앱을 켭니다. 32년 직장 생활이 끝났는데, 러닝머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을 얹으면 이야기는 더 심각해집니다. 지금 60세인 사람이 85세까지 산다고 가정합니다. 앞으로 25년입니다.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2%만 유지된다고 해도, 25년 후 화폐 구매력은 지금의 약 60%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지금 월 10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을, 25년 후에는 약 167만 원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정된 연금 수급액을 받는 노인에게 인플레이션은 매년 조금씩, 조용히 지급액을 깎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러닝머신 비유로 다시 보겠습니다. 젊은 근로자는 적어도 발을 더 빠르게 움직이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더 일하고, 더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 고정 수입에 의존하는 노인은 발 속도를 높일 방법이 없습니다. 벨트는 똑같이 역방향으로 돌아가는데, 뛰는 속도는 고정돼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벌어집니다. 조용하게, 그리고 되돌릴 수 없게.
2024년 기준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입니다. 평생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고, 국민연금을 냈는데도 노후에 가난해지는 구조의 결과입니다.
이 세 부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실하지 않아서 뒤로 밀린 것이 아닙니다. 러닝머신의 존재를 몰랐거나, 알았어도 손잡이를 잡을 여유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닙니다. 구조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 두 가지 시나리오
20년 동안 데이터를 봐온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이 러닝머신이 멈출 가능성은 낮습니다. 방향이 바뀔 가능성도 낮습니다. 바뀌는 것은 벨트의 속도뿐입니다.
시나리오 A: 인플레이션 고착화
KDI 경제전망과 IMF World Economic Outlook 자료를 종합하면, 한국의 구조적 물가 상승 압력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습니다. 에너지 전환 비용(탄소세·신재생에너지 인프라), 고령화로 인한 의료·복지 지출 증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비용 상승이 모두 물가를 위로 밀어올리는 구조적 요인들입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러닝머신의 벨트 속도는 계속 빠릅니다. 임금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면 실질임금 하락은 지속됩니다. 저소득 근로자, 기초생활수급자, 노후 준비 없는 고령층의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시나리오 B: 저성장 고착화
KDI 장기 경제전망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30년대에 1%대로 하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장이 없으면 임금도 오르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은 잦아들 수 있지만, 러닝머신이 멈추는 게 아니라 아예 작동을 안 합니다. 뛰어봐도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면 한국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이 걷지 않았던 길을, 훨씬 더 가파른 고령화 속도로 걷게 됩니다. 한국은 이미 OECD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성장까지 겹친다면 그 수치가 어디로 향할지는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짐작이 됩니다.
어느 시나리오가 실현되더라도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근로소득만으로는, 저축만으로는 실질 자산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지금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하게 적용됩니다.
러닝머신에서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속도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를 처음 정리했을 때, 솔직히 불편했습니다. 20년 동안 경제 데이터를 봐왔지만, 이 구조가 이렇게 선명하게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아지지 않느냐는 질문이, 개인의 나태함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이 글을 읽고 허탈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러닝머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은 다릅니다. 모르는 사람은 제자리에서 뒤로 밀리면서 자신이 게으르다고 자책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껴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벨트 속도를 모르는 채로 발만 빠르게 움직여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인 곳에서 드러납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실질 구매력으로 생각하는 습관입니다. 매년 연봉 협상 시즌이 오면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먼저 확인하십시오. 물가가 3% 올랐다면 임금이 3% 미만으로 오른 것은 사실상 삭감입니다. 명목 숫자가 올랐어도 실질로는 줄어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협상 테이블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드는 차이입니다. “작년보다 2% 올랐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물가가 3%인데 2%면 삭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서 다른 결과를 냅니다. 이것이 이 글에서 드리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으로, 화폐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중앙은행은 0%가 아닌 2%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합니까. 왜 돈을 찍으면 물가가 오릅니까. 이 질문들의 답을 아는 것은 투자 지식이 아닙니다. 자신이 서 있는 경제적 지형을 이해하는 기본 리터러시입니다. 지형을 모르면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절약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러닝머신의 벨트가 연 3%로 역방향으로 돌고 있다면, 지출을 3% 이상 줄이는 것은 이미 빠듯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수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절약은 손실을 줄이는 것이지,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에서 예상 수령액을 확인하고, 25년 후 실질 구매력이 얼마인지 계산해 보십시오. 불편한 숫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씨처럼 고지서를 받고 나서야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 것보다는, 미리 아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도 박 씨는 일용직 앱을 켭니다. 32년 직장 생활이 끝났는데, 러닝머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구조를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요. 아마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 흐름이 어디로 갈지, 솔직히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기술 혁신이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높여 임금이 물가를 훌쩍 앞지르는 세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데이터는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다.
러닝머신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열심히 뛰는 것은, 가장 성실한 방식으로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통장 잔액 옆에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적어두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이번 달 실제로 번 것과 잃은 것을 구분하는 첫 번째 줄입니다. 그 한 줄이 시작입니다.
다음 글 예고 이 구조를 설계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왜 중앙은행은 2%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고, 그 결정이 월급쟁이의 통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 다음 편에서 다룹니다.